10월의 산들은 울긋불긋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고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데, 나는 발목 부상 등 여러 가지 악재가 겹쳤다. 하지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는 주왕산 단풍을 놓치고 싶지 않아 큰 용기를 냈다. 내가 속한 안양TS산악회에서 떠나는 주왕산 산행은 마감이 되었는데, 총대장님의 배려로 막차를 타는 행운을 안았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주섬주섬 배낭을 꾸려 버스에 올랐다. 회원명단을 보니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데 전철진 대장님, 김동일 대장, 배이순 총무 등이 따뜻하게 맞아 주고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옆에 앉은 짝꿍은 전날 무박산행 후 오늘 또 산행을 왔다니 정말 대단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같은 고향, 동갑에 대화가 잘 통할 것 같았다. 짝꿍과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4시간이 넘는 거리가 지루하지 않았다.
▲ 짧은 시간 머물렀던 가메봉 정상에선 주왕산의 기막힌 풍경이 펼쳐졌다
드디어 청송에 도착. 단풍놀이가 절정인지라 전국에서 몰려든 차들이 엄청났다. 주차장 입구부터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급기야 차에서 내려서 걸어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창밖엔 사과나무에 열린 빨간 사과들이 군침을 돌게 했다. 깊은 산골에서 저렇게 강한 햇살을 받고 자란 사과이니 얼마나 맛있을까. 탐스런 사과를 두고 사방에서 감탄이 이어졌다. 전국에서 최고 맛있는 청송사과를 아직도 모르냐면서 반문하는 분도 있었다. 내가 왜 모를까. 2년 전 주왕산 사과 맛에 홀딱 반해 주위에 얼마나 홍보를 다녔었는데. 산행을 마치고 사과를 사겠노라고 마음먹었다.
주왕산 입구에 도착하니 어느덧 정오 12시였다. 코끝에서 느껴지는 공기가 도시와는 확 달랐다. 요즘은 해가 짧아 금방 어두워져 마음이 급해졌다. 이날 산행은 주왕산 종주 코스(6시간 예상)와 테마 코스(4시간) 두 코스로 나눠 진행했는데, 어느 코스로 선택할까 잠시 갈등했다. 여유롭게 가을 단풍을 즐기는 테마코스를 갈까 생각했는데 짝꿍이 진통제를 맞으면서 종주코스를 택하기에 나도 종주코스로 결정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한꺼번에 받은 많은 선물에 잠 못 이뤄
드디어 주왕산에 첫 발을 디뎠다. 살랑살랑 바람이 적당히 불고 입구부터 형형색색 단풍이 햇살을 받아 곱게 빛났다. 주왕산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곡 따라 단풍이 곱기로 유명한데, 돌돌 흐르는 계곡물 소리와 사각거리는 단풍들은 환상 그 자체였다. 올해는 예년보다 단풍색깔이 곱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출발이 늦어서 가메봉에 닿기 전에 점심식사를 했다. 나는 이른 새벽 도시락을 준비할 시간이 없어 빵을 싸갔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온도시락에 밥을 담아 온 정성에 너무 놀랐다. 짝꿍은 나에게 밥을 덜어 주고 누룽지까지 더 챙겨 주었다. 그 고운 마음에 마음이 찡했다.
조금 마신 막걸리에 기분이 좋아져서 히말라야도 뛰어넘을 기세가 되었다. 그런데 깔딱고개가 만만치 않았다. 경사가 꽤 가팔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막걸리 한 잔을 괜히 마셨나 싶어 살짝 후회가 되었다. 2년 전엔 이 고개도 쉽게 올랐었는데 그동안 산을 다니지 않은 표시가 확 났다. 전철진 대장님도 내 뱃살을 보고 “예전의 그 뱃살이 아니네”라고 하지 않았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 한 모금 먹는 사이 앞서가던 짝꿍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뒤에선 계속 따라붙고 큰일이었다. 힘을 내야 하는데 끝은 보이지 않고 속까지 울렁거렸다.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죽을 을 다해 오르는데, 저 앞에서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가메봉이었다. 주왕산의 기막힌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고, 가빴던 숨이 안정되었다. ‘아, 이 맛 때문에 주왕산에 오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메봉 감동도 잠시, 시간이 급했다. 주왕산의 기암괴석과 맑은 물을 보며 서둘러 절구폭포를 감상하고 대전사에 왔더니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무사히 종주를 마치는 순간에 깔딱고개에서 헤어졌던 짝꿍과 다시 만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때 우리 팀에서 막걸리를 권했다. 아마도 사과를 동동 띄운 사과막걸리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맛이 좋다면서 두 잔을 벌컥 마셨다. 산행의 고단함이 한꺼번에 다 씻겼다.
이젠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사과 살 사람들을 위해 가게 앞에 버스를 멈췄다. 나도 얼른 내려가 맛있는 사과를 골랐다. 단풍이 아름다운 주왕산에 무사히 다녀왔다는 안도감과 맛난 사과에 친절한 사람까지, 최고의 선물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받아 오늘 밤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