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창작수필 겨울호[다시 찾은 소중한 신발]
2022, 창작수필 겨울호[다시 찾은 소중한 신발-전옥자]
그날, 뭔가에 홀린 듯 정신이 반쯤 빠졌었다. 아마도 내 생애에 없는 ‘남의 딸’ 때문인 거 같다. 올 봄에 오랜만에 선배랑 점심을 먹었다. 선배는 지리 어두운 나를 위해 비교적 찾기 쉬운 영등포역 근처 근사한 식당에서 보자고 했다.
선배는 식당도 알아보고 미리 도착해 있었다. 오랜만에 선배와 묻어둔 수다와 함께 리코타 치즈 샐러드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쇼핑을 했는데 선배는 예쁜 원피스를 샀고 나는 그동안 눈여겨봤던 신상품 브랜드 신발을 샀다. 갖고 싶은 신발도 사고 선배와는 다음을 약속하고 집에 오는 전철을 탔다.
그때 띵똥 메시지가 온다. 어 누구지? 대뜸 ‘엄마 나 폰 고장나서 수리 맡기고 급한대로 PC로 접속했어. 문자만 가능하니까 확인되면 답장 줘!’ 바로 보이스피싱 메시지였다. 이런 유형의 메시지를 몇번 받은 적 있어서 나는 태연히 대응했다.
나는 ‘어딘데?’라고 반응을 보이자 바로 답이 왔다. 그 남의 딸은 ‘금방 대리점에 폰수리 맡기고 지금 밖이야. 엄마 뭐하고 있어? 지금 바빠? 엄마! 잠깐 시간 괜찮으면 부탁 하나 들어줄래? 대리점에서 피시로 접속하다가 임시폰 받은 거로 지금 연락하고 있잖아. 환불 받을 거 있는데 임시폰이라 못하고 있어. 엄마 폰 연결해서 환불 신청해도 돼?’ 반말 일색의 메시지였다. 나는 ‘우리 딸은 반말은 안하는데, 사기 그만치고 정직하게 살아!’라는 메시지를 보내자, 더 이상 반응이 없었다. 이 메시지로 인해 조금 전까지 하늘만큼 올라갔던 좋은 기분이 다 망가졌다.
집에 도착해 새신발을 신어봤다. 그런데 매장에서 잘 맞던 신발이 헐거웠다. 나의 발 사이즈는 225mm 좀 작은 편이다. 그날은 양말을 신고 230mm가 잘 맞았는데, 양말을 벗고 신으니 뒤꿈치가 많이 남았다. 교환을 할까말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교환해서 예쁘게 신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음날 바쁜 일정을 서둘러 마치고 신발 봉투를 들고 전철역으로 갔다.
석수역, 전철을 기다리면서 신발 봉투를 잠시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시선은 어디 둘 곳을 몰라 휴대폰을 들여다보는데 전철이 들어온단 신호가 울렸다. 나는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전철을 탔다. 운 좋게 빈자리에도 앉았다.
전철안을 쭉 살피니 출퇴근 시간처럼 붐비지는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휴대폰에 고개를 박고 한몸처럼 아주 자연스러웠다. 조금 지나자 ‘가산디지털단지역’ 이란 방송이 나왔다. 환승역이라 많은 사람들이 밀려 들어와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순간 손이 허전했다. 연두색 신발봉투가 손에 없었다. 새 신발이 나와 인연 아닐까. 한 번도 못 신어보고 어쩌지.
그리고 역에서 바로 내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관악역에 전화를 걸었다. ‘제가 조금 전에 역 의자에 물건을 두고 왔어요. 한 번 찾아봐 주세요.’ 역무원은 친절하게 5분 있다가 다시 전화하라고 했다. 5분후, 다시 전화했더니 ‘아무리 찾아도 없네요. 물건을 찾고 싶으면 직접 오셔서 112에 신고하고 CCTV로 확인하세요’ 라고 했다. 불과 10분 정도 지났는데 그렇게 물건이 금방 없어지다니 너무 허탈했다.
그리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보니 어머 내가 신발을 두고 온 역이 ‘관악역’이 아니고 ‘석수역’이었다. 관악역, 석수역은 내가 가끔 이용하는데 당황해서 역명까지 헷갈렸다. 다시 석수역에 전화를 했다. 연세 들어보이는 역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조금 전에 석수역에 신발을 두고 왔어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역무원은 ‘분실 물건이 뭐죠?’라고 물으셨다. 나는 ‘새신발이요. 연두색 봉투에 담겼어요!’ 그때 역무원은 ‘여기 역에 보관하고 있으니 찾아가세요’ 라고 했다. 맨땅에서 어쩔줄 몰라하던 마음이 다시 파도 타기를 시작하고 시냇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바로 석수역 방향 전철을 탔다. 석수역에 내려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역무실을 노크했다. 그때 저쪽에서 아까 그 목소리의 역무원이 예쁜 가방 하나를 옆에 끼고 헐레벌떡 뛰어오시면서 ‘무슨 일이세요’ 하고 물었다. ‘조금 전 분실물건 보관하고 계신다고 해서 찾으러 왔어요.’ 내가 분실했던 연두색 봉투가 사무실 저쪽에 보였다.
그 잠깐 사이 역무원은 또 어디선가 분실물건을 찾아 오던중이었다. 역무원 손에 들린 저 예쁜 가방 주인공도 가방을 얼마나 애타게 찾을까. 그리고 역무원 머리를 봤는데 히끗히끗한 곱슬머리는 반쯤 헝클어졌고 얼굴엔 땀으로 얼룩져있었다.
그때 역무원께서 굵은 음성으로 한말씀 하셨다 '아니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물건을 잃어버리는 고객이 많지?‘. 이 말씀이 웃음도 나고 슬프기도 했다. 하루에도 수십여 건 분실물을 찾아 역무원들은 저렇게 고생을 하시는구나. 정년을 코앞에 둔 역무원의 헝클어진 머리를 보니 괜히 울컥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이 살고 있구나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은 연두색 신발 봉투를 들고 신발매장에 갔다. 매장 직원이 묻지도 않았는데 나는 ‘신발 사건’ 을 소상히 들려주었다. 직원은 새 신발은 대부분 주인을 찾아오기 힘든데 정말 행운이라며 덩달아 기뻐해주었다.
그날 신발은 220mm 연두색으로 교환했는데 귀엽고 예쁘다. 주변에서 나를 닮은 신발이 주인 찾느라 너무 고생 많았다며 신발에게 잘해주라고 귀띔했다. 나도 힘들게 나를 찾아온 신발에게 예쁜 과일 굿즈를 달아주고 덜렁대는 주인 잘 봐달라고 특별히 부탁도 했다. 올 여름은 이 신발과 함께 많은 곳을 누비고 다녔다. 새 신발은 발을 깨물지도 않고 잘 넘어지는 잘 지켜주어 고마웠다.
그날, 내 생애 없는 남의 딸의 메시지만 아니어도 이렇게 얼떨떨한 경험은 없었을 것이다. 연 이틀 동안 웃픈 영화를 찍느라 힘들었지만, 반면 남의 딸이 어이없게 날뛰는 ‘보이스피싱’에 대한 경각심을 크게 깨닫는 기회도 되었다.
보이스피싱은 자신의 상황과 맞는 상황이 오면 남의 일 같았던 일이 곧 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겠다. 내가 받은 메시지는 주로 휴대전화가 고장 났다며 가족 행세를 하면서 계좌이체를 요구하거나, 상품권 구입을 요구하는 메시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세상엔 어이없는 금융사기부터 경찰, 검찰, 관공서 등을 사칭하는 보이스피싱이 날로 지능화되어 언제 어디서 누가 피해자가 될지 모르는 일이다. 세상이 복잡다단할 수록 ’바쁨의 물결도 잘 다스리고 마음을 꼭 붙들어매고 중심을 잡으라‘는 그날 역무원의 말씀을 오늘도 마음에 콕 새긴다.